경동교회(京東敎會, Kyungdong Presbyterian Church)는 서울특별시 장충동 소재의 장로교 교회이다. 1945년 광복 직후, 일본 강점기에 사용되던 천리교 교당을 종교 적산으로 불하받아 허물고 그 터에 세워진 선린형 제단을 그 시초로 삼는다. 이후 야고보 교회로 이름을 바꿨다가 경동교회로 다시 변경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표적인 교회 중 하나로, 김재준 목사, 강원룡 목사 등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진보 성향 목사들이 담임목사로 재직했다. 현재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현임 담임목사 겸 당회장은 채수일 전 한신대학교 총장이다.
현재 경동교회가 사용하는 교회 건물은 1981년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형태로 수도원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경동교회는 도심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도시의 큰길로부터 틀어진 곳에 건물 입구를 두고 있다. 쉽게 말해서 큰길에서 예배당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교회 외벽을 빙 둘러 들어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를 향하여 들어오는 길목으로부터는 좌우 양면에 수많은 계단이 이어지는데 이는 예수가 최후의 순간 골고다로 향해 걸었던 길을 상징한다.
경동교회 건물은 겉으로는 굉장히 과묵하고 약간 돌아선 것 같은 배타적인 모습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시를 향해서 굉장히 따뜻한 공간을 배려하고 또 혼란스러운 도시풍경에서 굉장히 정제된 건축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경동교회는 일반적인 개신교 교회와는 달리 교회 외관에 십자가가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른 높이의 기둥이 모여 하나의 매스로 건물 형태를 띠고 있는 구조이다. 그런데 이 외관은 보는 이들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혹자는 경동교회 건물의 외관이 기도하는 손을 닮았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횃불, 혹은 첨탑을 옆으로 본 모습을 닮았다고도 한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광복된 직후, 일본의 토착 종교인 천리교 사원이 한국 종교 단체들에 불하된다. 이 가운데 교회로 전환된 곳이 세 곳이 있었다. 바로 영락교회(예장), 성남교회(기장) 그리고 경동교회로서, 이에 따라 세 교회는 1945년 12월 2일로 창립일이 같다.
광복 후 최초로 설립된 개신교 교회 세 곳 중 하나인 경동교회는 중구 장충동 1가 26-1번지에서 30여 명의 어린이와 학생들이 선린형 제단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첫 예배를 드린 것을 시초로 삼는다. 선린형 제단은 김재준 목사와 강원용 목사 등이 세운 전도 조직이었으나, 해방 전후 시기에 중국 간도 용정 및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도중 공산당의 압박으로 인해 남한으로 월남하여 지금의 경동교회 자리에 터를 잡은 것이다. 당시 38선에 의한 분단으로 38선 이북에서 온 학생들은 학비 조달의 길이 막혀버렸고, 이런 학생들이 장충동 1가 현재 경동교회 터에 있었던 천리교 건물에 유숙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선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일터를 만들기에 앞서 우선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부터 세워야 한다는 취지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일을 먼저 시작했다.
참고로, 이때 선린형 제단의 별칭으로 야고보전도관이라고 하였는데, 성경의 인물로 신앙의 실천을 강조한 야고보와 같이 행동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이다. 창립 당시 이 모임은 초교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지도자 격인 김재준 목사가 장로교 목사인 이유로 인해 장로교 교단에 속하게 된다. 1947년 김재준 목사가 속해 있는 경기노회의 요구로 인해 경동교회로 이름을 개칭한다.
경동교회의 창립을 주도한 인물은 단연 김재준 목사였으나, 그는 목회보다는 신학 교육에 뜻이 뚜렷했던 인물이었다. 한신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의 창립에 참여한 인물이었던 김재준 목사는, 교회보다는 학교 일을 우선에 두었고,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경동교회는 설립 당시 청년이었던 강원룡의 주도 하에 틀을 잡아간다. 특히 강원룡 목사가 1949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시무 목사로 재직하게 되면서, 경동교회는 강원룡 목사의 비전으로 나아가게 된다.
반유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강원룡 목사의 영향으로, 1980년대 민주화 이전까지의 경동교회는 사회 참여의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1965년 설립된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운동으로 두드러진다. 독재정권에 비협조적이었던 성격으로 인해 교회와 강원룡 목사는 정치적 탄압을 경험한다. 강원룡 목사는 전태일의 죽음에 대한 설교 한 알의 밀알로 인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풀려났고, 1964년 이후 매년 성탄절에 라디오로 방송되던 성탄 예배 중계가 예고도 없이 당일 갑작스레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난다. 뒤이어 라디오를 통한 예배 중계가 중단되고, 심지어 1979년에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강원룡 목사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가 3일 후에 풀려나기도 했다.[5] 강원룡 목사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언덕에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불화로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비굴하게 자기 의지와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편, 강원룡 목사 시절의 경동교회는 틀을 허무는 문화선교가 두드러진 시기였다.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창립 기념 주일 등 각종 절기에는 마임극, 연극 등을 상연했고, 경건주의의 벽을 허물고 대중문화와 소통했다. 1969년에는 윤형주, 조영남, 송창식 등을 초청하여 통기타 예배를 진행하기도 했다. 특히 개신교의 절기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을 미국식으로 11월 셋째 주에 지내지 않고 우리 민족의 명절인 추석과 맞추어 지내기 시작하였다. 1982년 강원룡 목사는 당회에 사의를 표명하고, 김호식, 이동준, 김경재, 박종화 목사를 거쳐, 2015년 채수일 목사가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른다.
경동교회는 전례적 예배를 지향하는 교회이다. 이에 따라 경동교회의 예배는 기본적으로 말씀 선포와 성만찬을 중심축으로 하고 앞부분에 하나님 앞으로 모여오는 모임 예식이 있고 끝부분에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파송 예식이 들어선다.
경동교회에서 예배를 구성하는 시편 고독과 설교 성경 본문 그리고 찬송은 모두 교회력을 바탕으로 채택하여 쓰고 있다. 더 나아가 목회자와 예배순서를 맡은 자 및 성가대가 착용하는 예복 역시 한국 전통 예복을 중심으로 교회력에 따라 색상을 채택하여 입는다. 특히 성경 본문은 교회력에 근거하여 1년 52주의 구절이 이미 정해져 있다. 매 주일에 배정된 설교 성경 본문은 구약, 복음서 그리고 서신서에서 가져온 세 구절로써,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 주제에 따라 성경 구절을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정된 세 본문을 바탕으로 설교를 진행한다.
설교 성경 본문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경동교회에서는 주보에 다음 주일 설교 성경 본문을 미리 예시한다.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은 최소한 이미 공고된 성서 본문을 미리 읽고 묵상하고 와야 한다는 교육적 의미가 있다. 더불어 성가대 지휘자로부터 예배당 꽃장식을 하는 화훼전문인까지 동일한 본문을 기초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도록 노력할 수 있다. 이렇게 사전 지정된 성경 본문을 기준으로 주일 설교와 성가대 찬양은 물론 꽃장식이나 대표기도, 그리고 교독문 구절까지 통일성을 이루기 때문에 경동교회의 꽉 찬 예배는 국내를 넘어 유럽에서 상위 20%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하다.
이처럼 예배 전체의 모든 요소가 유기적이고 통일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경동교회는 설교뿐만 아니라 예배 전체를 인터넷으로 녹화 중계한다.
경동교회의 주일예배는 1부 예배 오전 9:30, 2부 예배 오전 11:30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고, 수요일에는 오후 07:30에 예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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